듀라한
2014-08-21“검은 폭풍 듀라한을 아는가?”
“누가 그를 모른단 말인가. 피를 갈구하는 검은 마검에 홀려 수천의 인간을 죽이고, 아무도 침입할 수 없는 성을 어딘가에 세운, 한때 인간이었던 악마를.”
-산 다유(San 茶喩)의 현자 쿤타킨테와 타리온의 소유자 리카마에론의 대화집 중 일부-
숨이 찬다. 얼마나 뛰었을까. 이마에서 흘러내리는 땀에 검붉은색 무언가가 섞여 있는 것이 보이진 않지만, 흘러내리는 기분이 끈적인다. 이마에서 곧바로 내려오던 것은 눈두덩에서 진로를 바꾸더니 잠시멈췄다가 다시 옆으로 흐른다. 끈적이는 기분이 상당히 불쾌하다. 잠깐 주위를 둘러본다. 주위는 조용하고 군데군데 불티가 내리는 비에 식어가고 있다. 마을 어귀에선 석양무렵이었는데 이미 스텔라(Stella, 生時星)가 중천에 떴다. 얼마쯤 베었을까. 여든두명까진 기억하는데.
-백 여든 세명. 열 일곱 남았어.
그녀의 목소리가 들린다. 머릿속에서 울리는 감미로운 목소리.
-잠깐 쉬어. 아직 밤은 기니까.
그녀의 말이 맞다. 아직 밤은 길다. 약속한 이백명까지는 열 일곱. 이 마을 사람이 다 도망가기 전에, 열 일곱쯤은 어떻게든 벨 수 있다.
-가슴이 뛰어. 아, 좀 이상한가? 난 심장도 없는데. 어쨌건 흥분되. 듀이. 니가 날 위해 이렇게 해 주는건 정말 기분좋아. 어느 주인도 날 위해 이래주지 않았거든. 따뜻한 피…
그녀는 뒷말을 살짝 흐린다. 흥분했기 때문일 것이다. 매혹적인 목소리. 빨려들어갈 것 같다.
이미 빨려들어가 있긴 하지만.
빗방울이 조금 더 굵어졌다. 몸에 부딪혀 새하얀 증기가 되어 올라가는 것이 느껴진다. 움직이진 않고 있지만, 몸이 차가워지거나 하는 일은 없다. 그녀가 있기 때문에. 그녀의 희고 긴 손가락이 피에 젖은 윙드헬름(Winged Helm)속의 뒷 머리칼을 꼬는 것이 느껴진다. 그 손은 천천히 내려와 목을 쓰다듬는다.
“넌… 아름다워…”
혼잣말처럼 작게 중얼거렸지만. 그녀에겐 들릴 것이다.
-“정말? 기뻐. 사랑해 듀이.”
귓가에서 천사의 노랬소리가 들린다. 소름끼치는 기분. 누구의 목소리가 이보다 아름다울까.
그녀, 칼리를 만난 것은 7년전이었다. 내가 열 여섯 때. 그때는 아직 작은 아이였다. 잉그램 남서쪽의 작은 영지 스무트에서 무기창고 담당 보초였던 아버지와 페리도트 같은 눈을 가졌던 어머니와 나와, 그렇게 셋이서 살 때, 아버지가 날 무기창고에 데려다 주었다. 거기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새까만 윤기가 흐르는 그녀는 그때까지는 그리 눈에 띄는 존재가 아니었다. 그때는 가장 친했었던, 친구. 슈타트 드 라판다우젠. 그리고 라플레시아 프린스턴. 그 둘이 나의 가장 큰 관심의 대상이었다. 슈타트는 영주의 막내 아들이었다. 본처의 소생이 아니라서 대놓고는 아니었지만, 성의 관리도 조금씩 그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쨌건 그 덕에 그는 감시도 없이 마음놓고 성 밖을 돌아다닐 수 있었고, 나랑 친구가 되어서 어설프게나마 같이 검술수련이란 것도 할 수 있었다. 어릴 때부터의 소꿉친구, 방앗간의 라플레시아는 블론드의 미인이었다. 그걸 알았던 것은 내가 열 여섯 때, 소나기를 피하러 둘이서 들어간 동굴 밑에서였다. 피워놓은 횃불 그림자가 일렁이는 그녀의 옆얼굴은 뭐랄까… 가슴이 뛰었다. 갑작스러웠고, 조금쯤은 폭력적이었음에도 그녀는 저항하지도, 소리를 지르지도 않았다. 그 뒤에도 자주 있었던 일이지만, 나는 그녀를 사랑했다. 그랬었다고 생각된다. 육체와 정신 양 쪽으로. 슈타트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웬일인지 그는 알고 있었다. 잘 해보라고 가끔씩 자리를 비워 주기까지 했다. 고마웠다. 좋은 친구라 생각했고, 행복한 순간이 계속 이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렇게 우리는 열 일곱이 되었다. 그때쯤 되어 나와 그와 그리고 그녀의 관계에 뭔가가 달라지고 있었다. 아니, 달라진 건 없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랬는지도. 슈타트와 라플레시아를 같이 만나는 경우가 많아졌다. 거의 항상. 그리고 가끔씩 그녀의 얼굴에서 놀란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보통 그들은 남서쪽 성벽 옆에서 시작되는 숲에 있었다. 사람 키를 넘긴 관목숲을 좀 헤쳐나오면 모습을 드러내는 공터, 그곳은 우리 셋의 비밀장소인 동시에 그녀와 내가 사랑을 속삭이던 장소이기도 했다. 그때 알아챘더면 뭔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칼리를 만날 수 없었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생각하니 잘 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없는 내 인생이란 생각할 수도 없게 되었으니까.
꽤나 후덥지근한 날이었다. 그녀를 다시보게 된 것은. 아버지를 도와서 무기 창고에서 녹이 너무 슬어 버려야 할 것들을 가려내고, 수리를 해야 할 것은 따로 대장장이한테 가져다 주는 일이었다. 그녀의 자태는 아직까지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의 위에 걸린 볼트(Bolts)랑 화살뭉치를 정리하러 손이 갔을 때야 그녀가 보였다. 잠깐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는 동안에도, 손은 위쪽 선반에 장작처럼 쌓여있는 볼트뭉치에 가 있었다. 볼트 사이에 뭔가 다른 날붙이가 한 개쯤 거꾸로 놓여있던 것이 있었을까. 손이 찔려 버렸다. 놀라서 창피할 정도로 비명을 지르고는 상처를 살폈다. 꽤나 깊게 찔린 모양으로, 피가 줄줄 흘렀다.
-‘괞찮으냐?’
아버지도 상당히 놀랐던 모양으로 들고 있던 스피어 뭉치를 내던지고 달려왔다. 나는 상처를 보여주기 위해 아버지 쪽으로 몸을 돌리려고 했다.
그때부터 였다. 그녀의 모습이 내 시야에서 사라지지 않았던 것은. 내 손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피가 그녀의 블레이드(Blade)를 타고 흘러내리고 있었다. 몇 방울인가는 힐트(Hilt)에도 튀어 있었다. 그리고 그건 곧 그녀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가듯 사라지고 그 자리에서는 완전한 검은색의 빛이 보였다.
-‘얘야. 괞찮은 거냐? 어디, 보자꾸나.’
아버지의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갈다. 하지만 이미 나는 그녀에게서 눈도, 마음도 뗄 수 없었다.
-갖고 싶어?
그녀의 목소리가 울렸다.
-갖고 싶어? 날?
다시한번 그녀의 목소리가 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듀라한. 상처를 보자나까. 아버지말이..’
아버지는 말을 끝내지 못했다. 내가 그녀를 안고서 뛰었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고함 소리를 뒤로하고 나는 그녀, 칼리를 안고서 무작정 뛰었다. 어디로 갈 건지도, 어디로 가는지도 몰랐다. 그렇게 한참을 냅다 달리던 내 얼굴에 관목 가지고 긁혀 따끔거렸다. 어딘지 알 것 같았다. 우리의 비밀의 장소. 여기라면 아무도 모를 것이다. 라고 생각했다. 빨리 들어가서 품에 안은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할 변명도 생각해야 했다. 하지만… 곧 변명따위는 생각할 필요도 없게 되었다.
관목숲을 헤치고 나온 내 앞에 보였던 것은. 그 둘이었다. 슈타트와 라플레시아. 하지만 내가 알고 있던 그들의 모습은 아니었다.
상기된 얼굴. 반쯤은 벗은 몸. 번들거리는 액체들. 잠시 아무말도 없이 조용했다. 그들도, 나도.
-“듀..”
슈타트가 옷으로 몸을 가리며 뭔가 입을 열려고 하자마자, 내 안에서 무언가가 끊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칼리를 휘둘렀다. 실밥을 자르는 것 같는 가는 파열감.
-“꺄아아아아아악!!!”
라플레시아의 그 비명이 내가 기억하는 소리의 마지막이다. 그녀를 깔고서 몇 번을 쌌는지 모른다. 어쨌건 더 이상 나오지 않고, 해가 어두워 질 때쯤. 주위의 소리가 들려기 시작했다.
언제 박혔는지는 모르지만, 그녀의 상반신엔 칼리가 박혀있었다. 그리고 그 주위는 까맣게 삭아 문드러져있었다. 이유모를 눈물. 그것이 또한 내가 마지막으로 울었던 기억이다.
그래서 나는 그녀와 함께 그곳에서 사라졌다.
-“듀이~~ 누가 오는데?”
그녀의 부드러운 목소리가 쓸데없는 상념에 빠져있던 나를 현실로 되돌린다. 꽤나 오랬동안 앉아 있었고, 차가운 비를 맞았지만, 몸은 식지 않았다. 그녀의 덕이다.
그녀의 말대로 곧 투닥거리는 발소리가 들린다. 자세히 들어보니 여럿인 것 같다. 그것도 훈련을 받은 기사.
예상은 맞았다. 크로스보우(CrossBow)와 기간테스롱보우(GigantesLongbow)를 든 열 명 정도의 병사, 그리고 꽤나 돈을 쳐바른 은백색 갑옷의 기사 셋. 포위되었다.
“거기! 검은 기사! 서라!”
제일 앞에 선 녀석이 개짖는듯한 소리를 낸다. 아무래도 요즘 나와 그녈 쫓아다닌다는 유일기사단(One Templar)인지 뭔지 하는 녀석들인 것 같다.
“그대가 이 마으…”
싸움에 말은 필요없다. 말하다. 목이 떨어진 그 녀석이 아마 다른 녀석의 교훈이 되었나 보다. 내 몸을 노리고 재어진 화살, 그리고 덤벼드는 두 개의 롱소드. 정면으로 찔러 들어오던 하나는 그녀의 블레이드로 살짝 빗겨 찔러서 띄웠다. 그리고 뒤로 들어오던 다른 것은 내 등에 닿기 전에 힘을 잃고 작은 소리를 내며 등갑에 부딪히더니 떨어진다. 그녀가 처리한 것이다.
나머지 병사들은 반쯤은 정신이 나갔고, 나머지의 반은 벌써 무기를 버리고 도망가려고 하고, 그 나머지만이 아직 싸울 의지가 있다. 하지만 의지와 실행은 별개다. 싸우려고 재어뒀던 볼트가 본래의 목적을 달성하러 내게 날아온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화살들이 힘을 잃는 것을 보고 도망가려 했던것들은 다리에 힘을 가하고, 싸우려고 했던 것도 도망가려 한다. 아직 열 넷이 남았다.
가까이 있는 녀석부터 하나씩 처리한다. 목, 배, 등, 어깨, 다시 배, 목, 머리, 머리, 머리, 허리, 허리, 머리, 목, 제일 먼저 있던 녀석이 검이 닿지 않는 범위에 있다.
-‘그만.’
그녀의 목소리가 머리에서 울린다. 나는 손을 멈춘다.
-‘보내줘, 재밌을 것 같아. 토벌대가 올거야. 그중엔 맛있는 피가 많겠지? 신앙을 가진 것을은 피가 맛있어. 독선에 가득찬 녀석들은 더.’
그녀는 기대감에 부푸는 것 같다.
-‘자, 그럼 마지막 하나를 찾으러 가 볼까? 200명을 채우고, 내가 맛있게 저녁 해 줄게. 아까 지나온 여관에 괜찮은 과일들이 들어와 있더라.’
그녀는 그렇게 말하지만, 아무래도 이 주위에 인간이 보이는 것 같지는 않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쉬었나보다.
-“저기, 저어기 헛간에 여자 둘.”
그녀가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다. 흰 피부가 빛난다. 그녀가 가리키는 곳은 아까 그녀의 마법으로 반쯤 무너진 헛간.
정말이다. 가까이 가 보니 안에 여자가 둘이 있다. 하나는 임신을 했는지 배가 불러있고, 고통스런 표정이다.
“꺅!”
임신한 여자를 돌보던 하나는 나와 그녈 보곤 기절해 버렸다.
나머지 하나는 공포에 떨면서 나를 쳐다보고 있다.
“사, 살려줘요… 제발….”
공포에서 나온 눈물. 그녀가 좋아하는 것이다.
-“듀이, 이 여자 곧 아기를 낳을 거야.”
그녀가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로 이백 명을 하고…. 이 여자 뱃속에 든 아기는 가져가자.”
그녀가 손가락을 튀기자 기절한 여자의 머리가 터진다. 뇌수와 피가 얼굴까지 튀자 임신한 여자는 공포에 질려 아무 말도 못한다. 그리고 그 여자의 배가 조금씩 꺼지고, 사타구니에서 뭔가 나온다. 아기가 나온다. 조금씩, 조금씩.
-“듀이, 나 이 아기 키울래. 괜찮지?”
그녀가 하는 말에 내가 반대할 리 없다.
-“고마워 듀이. 그래, 이제부터 니가 아빠, 내가 엄마가 되는 거야.”
아기가 나왔다.
고대 왕국의 유적에서 발견되는 신기한 물건들 중에는 가끔 스스로 자아를 가진 것들이 있어 지금을 살아가는 우리를 놀라게 한다. 요즘 세력을 얻고 있는 이름 없는 신을 모신다는 그 종교에서는 이것을 악마의 장난이라고 한다지만, 대부분의 신전에서는 인간에 의해 만들어진 영혼이라 생각한다. 이것은 대부분 인간이상의 지능을 가지고 인간의 안위를 도모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 같지만, 가끔씩 인간의 지성을 지배하고 그 주인에게 스스로의 의지를 강요하는 물건들이 있다. 발굴에 동참한 마법사들은 이것을 종래와는 약간 의미가 다르지만, ‘저주받았다.‘라고 부른다. 또한 이러한 물건들의 무서운 점은 일정시간 동안 보통의 물건인 것처럼 행세하다가 의지가 약하거나, 또는 자신의 마음에 드는 그 무었을 가진 사람이 나타날 때, 그 능력을 행사한다는 것이다.
-최대 규모의 마법왕국 시절 유적을 발굴한 라인 카슬러의 기록
듀라한 스트레인저(Durahan Stranger)
기간테스 산맥의 북동쪽에 300호 규모의 영지를 가진 어벤저. 에딘의 영주가 군대를 몇번 보냈으나, 모두 격퇴, 생존자의 말에 따르면 영주인 듀라한과 그의 아들인 듀라한이 117명을 모두 상대했다는 믿지못할 기록이 있음. 그 뒤로 영주는 그 영지를 포기한 상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