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 욕구

2011-10-31

달이 떴다. 그믐달도, 보름달도 아닌 어정쩡한 달이다. 밤도 그렇다. 새벽이 멀지 않은 것도 아니고, 해가 막 넘어가는 때도 아닌 어정쩡한 시간. 나는 고민하고 있다. 그래, 이것은 고민이다. 나는 아직 이 욕구에 굴복하지는 않았다.밤밤 명치 아래가 죄여온다. 검은 모니터로 내 모슴이 비친다. 그 뒤로 내 방이 있다. 나는 그 너머를 본다. 모니터에 찍히는 글자들은 내 관심사가 아니다. 지금, 바로 지금 내 관심사는,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내가 욕구에 굴복하는 것이다. 또 다시. 아직은 사람이 다닐 시간이다. 어정쩡한 시간. 아무도 다니지 않을 깊은 밤이라면 나는 이 욕구를 잠재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깊은 밤이라면, 나는 희생자를 구할 수 없을 것이고, 그것은 내 무의식도, 욕구도 동의할 것이다. 그러면 나는 그것들이, 내 자신이 잠깐 눈감아주어 생긴 그 찰나, 해가 뜰 때까지 아주 짧은 시간, 그 찰나만 이불을 뒤집어쓰고 견디면 될 것이다. 누군가 내 명치 아래를 잡아 비튼다. 눈을 감고 심호흡을 한다. 눈을 뜨면, 거기에 보이는 것은 모니터에 비친 내 모습. 더러운 욕구를 견디려 하는 인간. 필사적으로 그걸 감추려고 하는 자다. 다시 눈을 감는다. 아침이 오면 해가 뜰 것이고, 나는 아무 것도 없었던 것처럼 일터로 나갈 수 있을 것이다. 내가 이 욕구에 굴복하지만 않으면 말이다. 아니, 나는 잘 알고 있다. 이미 몇 번이나 그래왔다. 설령 내가 이 욕구에 굴복하고, 또 그런 짓을 저지르고, 내 속을 희생자의 공포와, 고통과, 어쩌면 있었을 미래로 채운다고 해도, 나는 아무렇지 않게 일터로 향할 것이다. 그래. 그럴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면 더 견딜 수가 없다. 마땅히 참아야 하고, 굴복해서는 안 되는 욕구에 굴복해 그릇된 짓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 않게 살아가는 자신을 용납할 수가 없다. 그런 나날이 계속되면 나는 더 추악해지고 더 많은 것을 원하게 될 것이다. 그래, 나는 이 마당에서도 희생자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추악한 나를 걱정하고 있다. 이 모습은 또 얼마나 추한지. 하지만 나는 혼자는 아니다. 지금 시간에도 이 욕구에 굴복한 자가 자기 욕망을 채우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고도 다음 날 아무렇지도 않게 집을 나서겠지. 뱃속에 사람을 가득 채워넣은 지하철 속에, 더러운 욕구를 숨기고 있는 인간이 들어차 있는 것이다. 그 자는 예쁜 옷을 입은 아가씨일 수도 있고, 교복을 입은 중학생일지도 모른다. 배가 나오고 머리가 벗겨진 중년남자일 수도 있겠지. 모습은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그들 모두 간밤에 그런 짓을 저지르고도 평온한 척, 아무 일도 없었다는 얼굴로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어 있는 것이다. 여전히 명치 아래가 죄여온다. 이렇게 생각해도 내 뇌는, 내 무의식은 내 욕구를 우선시한다. 인간이란 그렇게 진화해 온 것인가. 아니, 인간의 탓으로 돌리지 말자. 내 욕구는 원시시대에 채울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나는 아직까지 내 손을 더럽힌 적이 없다. 누군가 내가 모르는 자가 내 욕구에 맞추어 모든 준비를 끝내주는 것이다. 그런 시스템이 이미 갖추어져 있다. 그러니 모두들 그렇게 평온한 얼굴로 길을 나설 수 있는 것이겠지. 인간은 고통을 공감한다. 나는 괴물은 아니다. 분명히 아직은. 틀림없이 나는 그들의 고통을 공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못 본 척 하고 있는 것이지. 대다수 욕구에 굴복하는 자들도 나와 같을 것이다. 아예 처음부터 그런 생각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가, 그래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건, 그들이 우리의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희생된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들은 태어나서, 우리를 위해 희생된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아이들은 깨지고, 찢기운다. 노예. 아니 그런 단어로 표현할 수도 없다. 얼마나 추악한 시스템인가, 우리는 양심의 가책도 없이 그들을 희생시키고, 그 댓가로 누군가는 돈을 받고, 수많은 미래를 짓밟는다. 그것이 시스템이라는 이름으로 굴러가는 것이다. 아니 나도 살아는 있다 뿐이지 그 시스템에 지배당하고 있다. 누군가는 내 피땀을 빼앗아가고, 편안히 앉아 자기 욕구를 채우는 것이다. 그래, 똑같다. 나는 내 아래를 쥐어짜 내 원하는 바를 얻고, 그들은 나를 쥐어짜는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니 맘이 편해졌다. 아니, 아니다. 이래서는 안 된다. 마음이 편해져서 어쩌자는 건가. 또 그 욕구에 굴복하고, 그러고도 부끄러운 줄 모르고 내일 태양을 마주하자는 것인가. 술, 술이 필요하다. 술이 있으면 잠들 수 있고, 그러면 금방 아침이 올 것이다. 냉장고를 연다. 텅 빈 냉장고 안에 맥주가 딱 한 캔 있다. 부족하다. 이걸로는 그저 내 이성을 마비시킬 뿐, 내 몸과 함께 욕구를 잠재울 양이 되지 않는다. 냉장고를 닫고서 침대에 눕는다. 하지만 잠들 수가 없다. 욕구는 나를 흔들어 깨운다. 나는 그 욕구에 저항해서 눈을 감지만, 욕구는 강력하다. 나는 고대의 전사가 되어야 한다. 수천이 넘는 적들 앞에서도 칼을 들고 혼자서 달려드는 그런 용사가 되어야 한다. 잠깐이면 된다. 조금만 더 참아서 승리하는 거다. 스스로에게 되뇐다. 나는 그들이 몰려드는 것을 언덕 위에서 바라본다. 내 칼은 길고, 무겁다. 처음 달려드는 녀석의 목을 벤다. 몸을 돌려 두 번째를 반으로 갈라놓고, 세 번째를 걷어차 날린다. 그렇게 하나 하나 그들을 물리친다. 탁자 위 알람시계가 똑딱이는 소리에 맞추듯, 하나하나 베어나간다. 어느 새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있다. 하지만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 열 두엇만 없애면 된다. 나는 긴 칼을 휘둘러 둘을 한 번에 없앤다. 동시에 다른 주먹을 휘둘러 한 놈의 머리를 부숴버린다. 나는 지쳤고, 칼은 무뎌졌다. 그래도 계속 베어 나간다. 더 이상 칼이 들지 않는다. 나도 지치고, 적도 지쳤다. 마지막 하나. 나는 이제 들지도 않는 칼을 버리고 주먹을 휘두른다. 이미 피에 젖은 내 손은 쉽사리 맞지 않는다. 그렇다고 포기할 순 없다. 놈이 덤벼들고, 우리는 뒤엉켜 언덕을 구른다. 그놈의 팔꿈치가 내 머리를 치고, 내 주먹이 그놈을 후려친다. 양 쪽 다 힘이 없다. 그렇다면 최후의 수단으로 그놈을 물어뜯는다. 원초적 방법, 피가 튀기며 그놈의 생명이 내게 흘러든다. 나는 만족스럽게 웃는다. 그 놈도 웃고 있다. 그제야 정신이 번쩍 든다. 아니, 나는 진 것이다. 마지막에 와서 이런 상상을 하는 것이 아니었다. 기왕 할 것이라면 끝까지 칼을 썼어야 했다. 피와 생명, 농밀한 고기의 감촉을 생각하는 순간, 나는 져 버린 것이다. 욕구에. 이미 통화음이 들린다. 몇 번이고 건 전화, 나는 결국 졌다. 그래서 지금 이 추악한 욕구를 채우려 하는 것이다. 전화기 너머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온다. 그들은 이미 내가 누군지도 알고 있다. 서로 형식적인 인사를 하고, 아주 짧은 빈틈이 나와 전화기 너머 그 사이에 섰다. 몇 번이고 있었던 일, 나에게 원하는 바를 말하라는 바로 그 빈틈이다. 그들은 무슨 생각으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아니, 이제 와서 이런 고민 따위는 의미가 없다. 한 마디만 하면 된다. 그러면 그들은 나를 위해 따끈한 희생자를 준비하고, 나는 욕구를 채우고, 그들에게 돈을 지불하겠지. 아아 벌써부터 달콤한 욕망의 맛이 느껴진다. 얼마나 이 말을 했을까, 도저히 셀 수도 없다. 생각하는 것 보다 먼저 입에서 말이 튀어나간다. 내 귀에 그 말이 울린다. 안 돼.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하지만 이미 늦었다. 돌이킬 수 없다. 내 귀에 내가 하는 말이 들린다. “반반 무 많이요.”


거의 2년을 묵혀둔 소재. 걍 써 봤다. 아 졸려. 자야지. 내일 부끄러워 해야겠다.

일곱 도시 이야기 에릭 마이어의 CSS 노하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