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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2-25

“왜 내가 이 생각을 처음부터 못했을까.” 클라우드는 호수를 바라보며 감탄하고 있었다. 건너편에 진지에는 그리폰과 사자가 마주보는 군기가 펄럭였다. 아마 그 진지를 마주하고 술탄의 군대가 포진하고 있을 것이다. “그건 댁이 바보라서 그렇죠. 멍청한 천사님.” 안나는 이 근방의 무희들이 하는 얇은 얼굴 가리개를 하고 있었다. 그는 영화에서 봤던 것처럼 배꼽을 드러내는 짧은 웃옷과 풍성하고 비치는 바지를 입으라고 권했지만 돌아온 것은 싸늘한 시선뿐이었고, 결국 지금은 평범한 바지와 짧은 튜닉 차림이었다. 물론 평범한 바지라고 해도 이 시대의 바지는 그의 기준에서는 타이츠에 가까운 것이라 그녀의 다리를 감상하는 데는 별 문제가 없었다. 자주 그 안에 가려진 것을 보기는 했지만, 천에 감싸인 실루엣에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그는 그렇게 그녀의 다리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로 대꾸했다. “잘 생긴 천사라고 부르라니까. 요염한 천사님.” “헛소리 마요. 대체 왜 이런 괴상한 차림새를 하는 건지 원.”분 그녀의 부루퉁한 대꾸에 그는 자기 등에 달아놓은 날개와 전체를 검게 칠하고 희게 그림을 그린 자기 얼굴을 가리키며 말했다. “변장. 변장.” “취미 하고는. 변태.” 클라우드는 어색한 표정으로 웃으며 시선을 다시 호수 건너의 진지로 돌렸다. 전투가 시작된 듯 은은하게 북소리와 함성이 들려왔다. “그런데 저 공작님은 무슨 배짱으로 배수진을 치셨대?” “진다는 건 생각도 안 하고 있을 걸요. 당신처럼.” 그녀의 가시가 돋혀있는 말에도 그는 꿈쩍 않았다. “나한테는 승리의 여신이 붙어있거든.” “저 쪽에는 다른 게 더 붙어있을 지 모르죠.” 그 말에 답할 말을 찾고 있는데 쾌활하고, 약간 어눌한 말투의 남자가 그들을 불렀다.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고, 기억할 필요도 없을 테지만. 그는 그들이 호수를 건너갈 교통수단을 대여해 줄 남자였다. “좋아. 레아라교도 친구들. 준비는 되셨나?” 클라우드는 안나에게 건네려던 말을 지워버리고 허리춤에 찬 칼을 잡았다. 철그럭거리는 쇠가 그를 조금 안심시켰다. “대충.” 그는 숨결이 느껴질 정도의 거리에서 이야기를 계속했다. 투르크 사람들의 대화거리는 그가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거리보다 한 뼘 반은 더 가까웠다. “그럼 좋아. 확실히 정리를 해 두지. 우리 기수들이 자네들을 태워서, 호수를 구경시켜 주는 거야. 그런데 자네들은 몸을 너무 내밀다가 그리폰에서 떨어지는 거지. 우리 기수들은 워낙 위험한 지역이라 차마 내리지 못하고 그냥 뜨는 거고.” “좋아.” 그는 얼굴을 남자의 얼굴에서 조금 떼고는 그렇게 대꾸했다. “모든 것은 신의 뜻대로.” 남자는 수염에 감싸인 이를 드러내며 웃어보였다. “돈이 아니라?” “그분의 뜻은 여기에도 당연히 깃들어있지. 자, 자. 이제 슬슬 출발하라구. 괜히 시간 끌다가 때를 놓치면 곤란해.” 클라우드는 고개를 돌려 그가 타고 갈 것, 그리폰을 쳐다보았다. 어지간한 자동차만한 그 생물체는 한쪽 날개만 해도 오 미터는 되어 보였고, 부리는 도로공사용 드릴을 연상시킬 정도의 크기였다. 말을 기수째 채 간다는 말이 진짜로 보일 정도였다. 그 등에 두 명이 탈 수 있는 등자가 달린 안장이 얹혀 있었다. 열 두세살쯤 되었을 법한 소년과 그 소년과 덩치는 크게 차이나지 않지만, 서른이 좀 넘어보이는 남자가 그리폰 위로 줄사다리를 타고 올라갔다. 그와 안나는 서로를 바라본 다음 그리폰 위로 올라갔다. 그리폰을 탄다는 기분은 매우 좋았다. 등은 엄청나게 요동치고 세찬 바람에도 지울 수 없는 괴악한 냄새가 나긴 했지만. 비행은 짧았다. 가까이 가면 쿼럴에 맞을 우려가 높았으므로, 그들을 태우고 간 그리폰은 호수만 건너고 적당한 거리에서 기수를 돌리게 되어 있었고, 그들은 기수를 돌리기 전에 뛰어내렸다. 클라우드는 이전에 이런 짓을 해 본적은 없었지만, 기억도 안 나는 어릴 적에 태권도 도장에서 배웠던 낙법이란 것을 떠올려서 바닥을 굴렀다. “누구냐!” “적이다!” 자세를 잡고 일어나기 전에 소란스런 소리가 들리고 무언가가 이쪽으로 날아왔다. 정신없이 몇 번을 구르고 허리의 칼을 간신히 뽑아들자 안나가 외쳤다. “어서! 이쪽!” 그녀의 목소리를 따라가니 그녀가 천막을 가리켰고, 그 앞에는 할버드를 든 병사들이 스무 명 정도 있었다. “잡졸은 비켜! 신의 심판이다!” 그가 미리 준비한 대사를 외치며 검을 뽑아 그들에게 달려들었다. 병사들은 굳은 얼굴로 할버드를 그에게 내밀었지만, 그의 검에서 불꽃이 솟아오르자 클라우드가 접근하기도 전에 도망가 버렸다. “소울 인프레이머다!” “적이다!·” “이그니스 아첸디토어다!” 다양한 외침이 들려왔고, 그는 그것에 아랑곳 않고 천막으로 달려들었다. 불꽃에 천막이 불타올랐다. “누구냐!” 여러명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클라우드는 그 중에 한 명을 알아낼 수 있었다. 들은 적도 없는 목소리고, 만난 적도 없는 얼굴이었지만, 그는 그 사람을 알 수 있었다. 가장 죽이고 싶은 자가 공작이다. 그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검을 휘둘렀다. 불꽃에 덮인 검은 명확한 살의를 가지고 빛나며 초승달을 그렸다. 그 초승달이 완전히 웃기 전에, 그 불꽃은 가로막혔다. 다른 불꽃으로. 클라우드는 그 불꽃을 일으킨 남자에게 인사를 했다. “안녕하신가. 세스카 알렉산드로스 경.” “누구냐.” 낮은 목소리로 으르렁대는 세스카의 등 뒤에서 호랑이 모양의 신기루가 그를 노려보며 으르렁댔다. 클라우드는 쾌활한 목소리로 “날개가 안 보이나? 자네를 신의 나라로 인도할 천사님이야.” “어디서 온 미친놈인지는 모르겠다만···.” 그의 말이 끝나기 전에 클라우드의 발이 그의 옆구리로 날아들었다. 세스카의 몸과 함께 그의 영혼의 그림자(Tenebrae Anima)가 날아갔다. “주군!” 금속이 내지르는 비명과 함께 사방에서 칼이 뽑혀 나왔다. “이야이야. 역시나 굉장한 부하들을 거느리고 있구만.” 클라우드는 검으로 세스카를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검 끝은 천천히 원을 그리고 있었다. 세스카의 얼굴에 사나운 웃음이 떠올랐다. “물러서라!” “주군!” 주위의 기사들이 당장이라도 달려들 듯이 움직였지만, 막상 달려들지는 않았다. 알고 있는 것이다 이그니스 아첸디토어에게 정면에서 여럿이 달려들 수가 없는 것을. 불꽃의 검은 검을 맞대어 멈출 수 없다. 희생 없이 그들을 없애려면 화살을 쏘는 방법 뿐. 하지만 가까이에 공작이 있다. 여기까지는 클라우드의 예상대로였다. “너희가 감당할 상대가 아니다.” 세스카는 똑바로 서서 검을 곧추세웠다. 클라우드는 그 자세가 어쩐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그 전에 그의 입이 먼저 움직였다. “당신 혼자 감당할 상대도 아닐 텐데?” 세스카는 그의 도발에 응하지는 않았다. 대신 클라우드의 뒤에 있는 안나에게 인사를 했다. “오랜만이군. 안나.” “오랜만이군요. 공작님. 하지만 공작님의 상대는 제가 아니랍니다.” 안나는 약간 굳은 목소리로 인사를 받았다. 클라우드는 조금 놀랐다. 변장을 하긴 했지만 아는 사람이라면 알아보는 게 힘들지는 않다. 그가 놀란 이유는 둘이 아는 사이라고 안나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알아?” 클라우드는 최대한 신경쓰지 않는다는 말투로 그렇게 물었고, 안나는 신경쓰이게 만드는 대답을 했다. “중요하지 않은 일이에요.” 세스카는 클라우드를 완전히 무시한 채로 안나에게 말을 걸었다. “이탈리아 어디엔가 있다고 들었는데···.” 등 뒤에서 안나가 칼을 뽑아드는 소리가 들렸다. 스산한 금속음 뒤에 그만큼이나 냉랭한 안나의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많이 들으면 여기 이 친구들도 다 죽여야 해요.” 클라우드가 보는 앞에서 세스카가 약간 놀랐다는 표정을 짓더니 다시 그 사나운 웃음을 얼굴에 띠고서 말했다. “자네, 아직 죽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었나?” “글쎄요.” 클라우드는 더 이상 참을 수 없어서 으르렁대며 말했다. “어이, 나는 안 보이는 거야?” 그 말을 듣고서 세스카가 클라우드를 쳐다보았다. 마치 아직까지 거기 있었냐고 말하는 듯 했다. “지금이라도 물러서면 없던 일로 해 줄 수도 있지만···.” 세스카가 말을 끝내기 전에 클라우드가 도약했다. “우하!” 기합성과 함께 칼날이 빨려들듯 세스카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그 검 끝에서부터 불꽃이 거세게 타올랐다. 파삭. 하지만 그 일격은 검끼리 부딪힌다고는 생각할 수 없는 소리와 함께 무산되어 버렸다. 클라우드는 검을 고쳐잡으며 세스카를 노려보았다. “주군!” 한 명이 칼을 들고 클라우드에게 달려들려고 하다 갑자기 멈췄다. 그의 발등에서 칼 손잡이가 튀어나와 있었다. “으아아아!” 그 뿐만이 아니었다. 주위에 서 있던 다른 자들도 모두 발을 부여잡고 비명을 질렀다. 안나는 손을 저어 그 칼을 다시 회수하고는 조용히 말했다. “괜히 끼어들려고 하다간 죽어요.” “좋군.” 세스카는 칼을 들어 클라우드를 겨누었다. 클라우드는 흥분과 분노에 머리가 일렁이는 중에도 여전히 그 자세가 묘하게 낯익다고 생각했다. 무언가 떠오르려고 하기 직전에 벼락이 내려왔다. “호!” 엄청난 기합이었다. 그 소리와 함께, 사 미터는 떨어져 있었던 공작의 검이 그의 머리로 떨어져 내렸다. “나쁘지 않은 반사신경이다. 공룡의 아니미라. 지금까지 본 것 중에서 가장 큰 거로군. 그거 티렉스라고 하던가?” 등 뒤에 호랑이가 일렁이는 채로, 세스카는 그렇게 말했다. 클라우드는 막고, 뒤로 뛰어 거리를 벌리긴 했지만, 그 공격이 들어오는 것을 느끼지도 못했다. 그가 막은 것은 검이 오기 전에 살기가 먼저 그의 머리를 쪼개버렸기 때문이다. 그는 그 정신적 통증이 오는 곳으로 검을 가져가기만 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오래가지 않았다. 몇 합이 오간 후, 간신히 클라우드가 거리를 다시 벌리자 세스카는 자세를 고쳐잡고 웃음지으며 말했다. “이제 친절하게 가르쳐주진 않을 거야.” 클라우드는 세스카의 웃음을 보며 소름이 돋았다. 그는 강했다. 클라우드보다 압도적으로. “강하군.” 클라우드는 얼떨떨하게 그렇게 말할 수 밖에 없었다. 세스카가 비웃음인지 뭔지 모를 모호한 미소를 지었다. 클라우드는 한 발짝 옆으로 걸으며 물었다. “어떻게··· 어떻게 그렇게 강한 거지?” 그는 왼손으로 오른쪽 어깨를 가리고 천천히 원을 그리며 돌았다. 세스카는 움직이는 것 같아 보이지 않았지만, 계속 그와 마주보고 있었다. “같은 소울 인프레이머인데 말인가?” 생경한 단어, 하지만 그는 그 말을 알 수 있었다. 세스카는 김영운에게 익숙한 그 단어를 사용해서 말했다. “난 이 쪽이 맘에 들어. 이그니스 아첸디토어보다는.” 세스카는 계속 말을이었다. 여전히 그의 정면에 서서. “간단히 얘기하자면 청년. 자네하고는 짊어진 게 다르거든. 그런 가벼운 검에는 밀리지 않아.” 그가 그렇게 말하는 순간 클라우드는 그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알았다. 그는 그 무도를 입에 올렸다. “검도?” 클라우드가 그 말을 하는 순간 세스카의 얼굴색이 변했다. 클라우드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파삭. 하지만 이번에도 허탕이었다. 분명히 맞췄다고 생각했지만, 너무나 가볍게 그 공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세스카는 놀란 얼굴로 안나에게 물었다. “그렇군. 그랬어. 이 사람이 자네가 찾던 사람인가?” 안나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클라우드는 그녀의 얼굴을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세스카는 말을 하는 와중에도 그에게 똑바로 살기를 보내왔다. “그건 그가 쟁취할 일이죠.” “그래도 봐 줄 수는 없어.” 세스카의 말에 안나가 가볍게 코웃음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차갑게 말했다. “바라지도 않아요.” 그 말을 신호로 다시 클라우드는 세스카에게 달려들었다. 세스카가 먼저 공격하게 하면 승산이 없었다. 손목 스냅만을 이용해서 칼을 친다기 보다는 마구 휘저어 공격했다. 어차피 영혼의 불꽃은 스치기라도 하면 중상이다. 강한 힘의 참격보다는 빠른 것이 효과가 좋은 것이다. 거기다 둘의 대화가 계속 이어지면 머리가 더욱 혼란스러워 질 것 같았다. 하지만 세스카는 그 공격을 받으면서도 여유가 있어보였다. 그러다가 세스카의 빈 오른쪽 어깨로 클라우드가 공격을 넣으려는 순간, 머리 전체를 관통하는 살기가 그의 몸을 굳게 만들었다. 다리가 풀린 건지, 자기가 주저앉은 건지도 알아채지 못하고 그는 바닥을 굴렀다. 오른손의 검을 마구 휘저으며 바닥을 굴러 거리를 벌리고 간신히 일어나자 세스카가 비웃는 것 같은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과 같은 자세로. 그 다음에 세스카가 한 말이 그의 다리를 붙잡았다. 정확히는 그가 쓴 언어가. “이런걸···. 그래, 뇌려타곤(懶驢惰坤)이라지?” 충격에 잠시 멍한 사이 검이 그의 머리로 날아들었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클라우드가 그걸 알아챈 것은 세스카가 다시 거리를 벌린 다음이었다. “안 끼어든다고 하지 않았나?” 능글능글한 얼굴로 세스카는 클라우드 뒤의 안나에게 물었다. 방금 전과 똑같은 약간 어색한 한국어로. “먼저 약속을 어긴 건 공작님일텐데요.” 하지만 안나의 대답은 이탈리아어였다. 화가 난 목소리였다. 클라우드는 머리가 멍해져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런 그에게 안나의 질책이 날아들었다. “뭐 하는 거예요! 당장 움직여요!” 그녀의 뾰족한 소리에 클라우드는 다시 세스카에게 달려들었고, 그의 검은 여전히 세스카에게 닿지 못했다. “그래, 자네는 얼마 줬나?” 세스카는 거리를 벌리자마자 그렇게 물었다. 그 얼굴이 마치 동네 쌀가게 아저씨 웃음 같아 영운은 소름이 끼쳤다. “공작!” 안나의 뾰족한 목소리가 날아들었지만, 세스카는 그 말을 무시했다. “흠.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얼굴이구만. 자네 몇 살인가? 난 올해 백 스물 셋이겠군. 한국 나이로 치면 말이지.” 클라우드가 아는 세스카 알렉산드로스는 사십대였다. 멍한 얼굴로 클라우드가 물었다. 한국어였다. “설마 당신도? 한국사람?” “이계···환생물이라고 하지? 읽은 지 하도 오래되서 기억은 잘 안 나지만, 오기 전에 병원에서 좀 읽었지. 재밌더구만.” 클라우드는 멍한 얼굴로 세스카를 쳐다보았다. 검도 발도 멈춘 그 상태의 그에게 기사 한 명이 달려들었다. 오른쪽으로. 그는 아무 생각없이 파리를 쫒듯 오른손을 흔들었고, 그 기사는 검과 몸이 함께 잘려나갔다. 세스카의 눈썹이 꿈틀댔다. 그가 크게 소리질렀다. “달려들지 마라! 방해다! 로이드! 이쪽은 신경 쓰지 말고 전쟁에 집중해라! 이쪽은 나 혼자로도 충분하다!” 그 다음 여전히 멍한 얼굴인 클라우드를 쳐다보며 말했다. “정말 아무것도 모르나보군.” 안나의 뾰족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그거 계약위반 아닌가요?” “그건 자네 계약이지. 나는 상관없거든. 돈 좀 더 주지 그랬나.” 세스카의 대답에 클라우드의 얼굴이 달라졌다. “돈?” “몰랐어? 돈이면 귀신도 부린다고 하지?” 세스카는 싱글거리며 대꾸했다. 클라우드는 뭔지는 모르겠지만, 갑자기 세스카의 살기가 진해진 것을 느꼈다. “어차피 죽여야 할 텐데 이 쯤 해야겠군.” 세스카는 그렇게 말하며 검을 조금 높이 올렸다. 그 검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클라우드는 그제야 세스카는 지금까지 불꽃을 꺼 놓았던 것을 깨달았다. 영혼의 불꽃은 계속해서 태울 수 없다. 연속해서 태울 수 있는 것은 길어야 삼십 분. 그는 말을 하면서 힘을 비축했던 것이다. 클라우드는 멍청하게도 그걸 모르고 계속 불꽃을 피우고 있었고. 한 합 한 합을 막아내는 것이 힘겨웠다. 폭발적으로 날아들어오는 검을 한 손만으로 막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아무리 이그니스 아첸디토어의 검에는 힘이 실릴 필요가 없다지만 검과 검이 맞붙는 순간에는 어찌되었든 힘이 필요했다. 같은 이그니스 아첸디토어의 검이라면 잘려나가지 않으니까. “흡!” 그는 헛바람을 들이켰다. 방금 세스카가 날린 참격이 위험했던 탓이다. 이번의 공격에는 검을 놓칠 뻔 했었다. “하!” 날카로운 기합과 함께 세스카의 검이 다시 머리로 날아들었다. 결국 그는 바닥을 다시 굴러야 했고, 배로 세스카의 발이 날아들었다. 몇 미터를 굴렀다가 정신을 차리니 안나의 등이 보였다. 공작은 오른쪽 어깨와 왼쪽 허벅지 갑옷이 깨졌고, 피가 흘러내렸다. 세스카는 조금 흐트러지긴 했지만 여전히 위압감 있는 모습으로 서서 말했다. “안 끼어든다고 하지 않았나?” “내 눈앞에서 그를 죽일 수는 없어요.” 대답하는 안나의 목소리가 조금 잠겨 있었다. 클라우드는 그 말에 가슴에 최소한 두 개의 감정이 차오르는 것을 느꼈다. 수치와 행복. 여전히 그는 약했다. 안나는 그를 위해 나서 주었다. 그는 아직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안나는 그를 걱정했다. 행복은 수치를 더욱 깊게 만들고, 그는 그 사실이 슬프고 화가 나서 견딜 수 없었다. 클라우드는 일어섰다. 세스카는 그 쪽에 눈도 돌리지 않고 안나에게 말을 걸었다. “자네랑 나랑 지금 싸우면 싫어할 것들이 좀 있을 텐데?” “어차피 짐승들은 싸우라고 키우는 거죠.” 안나는 냉랭하게 대꾸하면서 어딘가로 칼을 날렸고, 병사인시 기사인지의 비명이 들렸다. 누군가가 활이나 석궁을 준비하고 있었으리라. 그녀는 조금 슬픈 목소리로 세스카에게 말했다. “그냥 깔끔하게 보내드리죠. 저항은 헛수고예요.” 클라우드는 세스카가 아주 잠깐 자신에게 눈을 맞추고 웃어보였다고 생각했다. 명백한 비웃음. 불길한 느낌이 왼쪽 겨드랑이 조금 위를 찔러 들어왔다. 고통에 반응하기 전에 그의 입술이 열렸다. “조인규.” 덜컥. 들릴 리가 없는 소리가 들렸다. 안나가 그대로 굳어서 모래가 된 것 같은 기분이었다. 화살이 날아왔고, 클라우드가 그걸 쳐 낼 때도 안나는 반응하지 않았다. 그가 그녀 앞에서 다시 검에 불꽃을 피워 올리자 그녀가 비명처럼 외쳤다. “어딨죠?” “호오. 그냥 가르쳐달라는 건가?” 세스카의 입꼬리가 말려올라갔다. 클라우드는 그가 지금 자신을 보고 웃고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살려드리죠.” “무슨 소리야! 안나! 그게 누군데!” 그녀는 그의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다. 세스카는 클라우드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안나에게 대답했다. 클라우드는 지금 완전히 무시당하고 있었다. “자네가 지금 당장 여기서 떠난다고 약속한다면, 나도 그가 어디 있는지 가르쳐 준다고 약속하지. 그는 물론 매우 잘 있어.” “안나!” 클라우드는 소리질렀지만, 안나는 그가 안 보이는 것처럼 세스카에게 대답했다. 그 목소리에 망설임은 없었다. “약속하죠.” “보르지아 가의 쌍둥이를 찾아가서 인사를 하게. 친절히 가르쳐 줄 거야.” 안나가 그제야 클라우드를 보았다. 클라우드는 그녀를 봐 온 지 2년 지났지만, 그녀가 눈물 비슷한 거라도 보인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그녀의 눈에 맺혀 있던 것이 볼을 타고 떨어졌다. 그것을 훔치고, 입을 가린 채로, 그녀가 무어라 말했다. 그는 그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싫었다. 그녀는 입가를 가린 손을 떼고 입을 벙긋거렸다. 클라우드는 그녀가 무슨 말을 할 건지 알 수 없었지만, 듣고 싶지 않았다. 그녀가 숨을 크게 들이쉬고, 꺽꺽대는 소리를 섞어 말했다. “안녕.” “안나?” 클라우드의 목소리가 떨렸다. 그녀는 클라우드에게 달려들려는 기사 둘에게 칼을 날려 쓰러뜨렸다. 그녀에게 날아간 화살은 맑은 소리를 내며 튕겨나갔다. 그녀는 울 것 같은 얼굴로 그에게 작별을 말했다. “응. 안녕이에요. 이제.” 안나는 클라우드에게서 한 발짝 멀어졌다. “이건 거짓말. 나는 그런 거엔 상처입지 않아요. 내 꿈도 거짓말.” 그녀는 손등에 있던 상처를 떼어냈다. 일회용 밴드처럼. 그녀는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당신이 정말로 세계를 정복한다면, 그래. 그렇다면 돌아올게요. 안녕. 김영운. 사랑해요. 살아줘요. 제발.” 말을 마치고는 그대로 몸을 돌렸다. 탁 하는 소리가 들렸다고 생각한 순간 그녀의 몸이 하늘로 솟았고, 북쪽으로 사라졌다. 이름을 부를 생각도 하지 못하고 하늘을 바라보는 클라우드에게 세스카가 말을 걸었다. “작별은 끝났지? 자, 그럼 이제 싸움을 계속해볼까.” 클라우드가 몸을 돌리자 세스카는 처음 봤던 그 대로, 검을 중단으로 들어올리고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비웃음 보다는 동정이 전해져왔다. 세스카가 말했다. “나도 그랬어. 어느 날 보니 마누라가 애를 데리고 사라져 있더군.” 마치 철 지난 드라마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클라우드의 정신이 조금 돌아왔다. “여자는 참 잔인해. 뒤도 돌아보지 않지.” 그럴 리가 없다. 그런 아줌마와 안나를 같이 놓지 마. 안나가 그럴 리가 없어. 카랑하는 소리가 그의 상념 중간중간에 끼어들었다. 철과 철이, 살의와 살의가 부딪히는 가운데 클라우드는 필사적으로 현실을 부정했다. 안나는 날 사랑해. 그 남자는 누구지. 안나는 날 사랑해. 그렇게 깊은 상처가 왜 사라진거지? 그건 분명히 날 감싸다 입은 상처인데. 안나는 날 사랑해. 그래서 날 감싸고 상처입은 거잖아. 그래, 사랑한다고 했잖아. 안나는 지금까지 날 도와줬어. “가서 무릎을 꿇고 빌었다. 그래도 안 되더군. 아이도 보여주지 않았다. 아이는 아무것도 모르게 하고 키운다더군. 고생시키고 싶지 않았대.” 조인규? 그건 뭐하는 새끼야. “그 남자는 돈이 많았다.” 돈이 많은게 무슨 상관이야. 여기서 돈은 상관없잖아. 그 새끼는 어디서 쳐박혀 있다가 이제야 나타났는데. 안나는 날 사랑해. 그 새끼는 상관없어. “그것 때문에 돈을 벌었어.” 돈이면 다 되냐? 안나는 그건 걸 보고 날 사랑한 게 아니야. 안나는 항상 나하고 같이 있었다고. “그래서 돈을 벌고.” 방금 했잖아. 그 얘기는. 닥치라고 좀. 그런데 왜 안나가 간 거지? “그 다음에 찾아갔더니.” 안나는 울었잖아. 나한테서 떠나기 싫었잖아. 그런데 왜 떠난 거야? “많이 늦었더군.” 아 좀 닥치라고. “아이는 나를 인정하지 않았다.” 나라도 안 하겠다. 칠십 년대 신파 찍냐? 근데 안나는 왜 떠난거지? “마누라도 이제 와서 무슨 짓이냐는 소리나 했지.” 그래. 저 새끼가 뭐라고 했지. “그래서 좀 술을 먹고 나니까.” 안나는 나한테서 떠나기 싫었어. 사랑하니까. 근데 울면서 떠났지. 왜? 클라우드의 머릿속에 명확한 결론이 떠올랐다. 진부한 표현처럼 불을 보듯 뻔했다. 네 탓이다! 눈앞의 남자는 검을 들어 클라우드를 내려치면서도 푸념을 늘어놓는 걸 멈추지 않았다. “의사가 얼마 못 산다고 하더라구.” “그럼 죽어!” 클라우드의 검이 맹렬히 타올랐다. 세스카의 검과 부딪힌 불꽃은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그 검을, 세스카의 몸을 통과해서 허공에서 멈췄다. 세스카는 자기 엉덩이 위에 등부터 떨어졌다. 그는 아직도 불타고 있는 검을 휘저었지만, 반 동강난 검은 클라우드에게 닿지 않았다. 그의 입이 열렸다. “말도···.” “내 검이 더 뜨겁다는 거지. 영감. 그딴 푸념 늘어 놔 봐야 소용없어. 나하고 댁은 다르다고.” 클라우드는 숨을 헐떡이며 자기에게 달려드는 기사 두 명을 베어 넘겼다. 화살이 메겨지는 소리가 들렸지만, 클라우드의 눈은 바닥에서 피를 흘리는 세스카에게 고정되어 있었다. 그는 클라우드를 바라보며 또렸한 목소리로 물었다. “판도라의 상자에 왜 희망이 마지막까지 남아있었는지 아나?” 클라우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달아온 화살과 쿼럴들을 쳐 내었다. 몇 개는 공작의 팔다리에 가 박혔다. 세스카가 히죽 하는 소리가 들릴 정도로 웃었다.풀 “그게 제일 지독한 놈이라서 그래. 환영한다. 멍청아. 희망을 품고 살아가 봐라.” 세스카의 목은 허공을 날아 호수에 빠졌다.


지우려고 보니 어쩐지 아깝기도 하고… 오늘 한 쪽을 쓰고 10쪽을 지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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