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원

2008-12-14

변덕. 그 날 그 일의 발단을 간단히 한 단어로 정의하자면 그 단어 말고도 여러 가지 단어가 있을 것이다. 우연. 필연. 무의식. 어쩌면 운명. 그 날은 갑자기 비가 쏟아졌다. 나는 우산이 없었고, 목적지는 백여 미터 떨어져 있었다. 내리는 비를 맞으며 목적지인 패스트 푸드 점으로 들어가 기상청을 욕하며, 오늘 따라 막히지도 않는 부산 교통을 원망하며, 약 30분 정도를 기다리면 약속 상대가 나올 것이다. 평소의 나라면 분명히 그랬을 것이다. 그 길에 천막을 치고 있는 타로 점집이 있었던 것이 하루 이틀은 아니었다. 적어도 오 년은 그 자리에 그 점집들이 있었다. 그러니 한 셔플에 삼 천원. 따위의 글을 써 놓은 점집을 본 것도 처음이 아니었다. 그러니 나는 그 익숙한 풍경을 인식도 못 하고 지나쳐서 목적지로 가 있어야 할 터였다. 하지만 나는 그러지 않았다. 몸을 돌려, 보라색 천막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들어가면서 내가 뭐하는 짓인가 하는 생각이 살짝 들었지만, 약속장소의 싸구려 햄버거를 뱃속에 우겨넣으나, 여기서 일흔 여덟 장 짜리 우연에 내 시간을 우겨넣으나 크게 차이는 없었다. “어서오세요.” 들어가는 순간, 잘 녹은 치즈 안개같은 목소리가 나를 눌러 앉혔다. 점쟁이는 가볍게 감탄할 정도로 서양 점쟁이라는 것에 충실한 차림새를 하고 있었다. 연보랏빛 두건을 푹 눌러 써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그 두건을 펼쳐보면 틀림없이 예쁜 얼굴이 나올 거라는 별 근거 없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앉자마자, 그녀는 카드를 섞으며 말을 걸었다. “소원이 있을 테지요?” “네?” 당황하고 말았다. 소원이라. 흔히들 쓰는 단어는 아니었다. 소원, 램프, 3번 따위의 단어가 머리를 스쳤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자는 계속 말했다. “소원이 있을 테지요?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 “아, 네.” 그냥 그렇게 밖에는 대꾸할 수 없었다. 소원이야 있을 수 있지. 그리고 보통은 혼자서 이룰 수 없으니까 소원하고 있는 것이 아니던가. 이룰 수 있었다면 이미 이루었을 테고, 이루어지고 있는 중이라면 소원이라고 부르지도 않을 것이다. “그래 그 소원은 뭔가요.” 나는 갑자기 심술이 났다. 어울리지 않는 단어선택, 기껏해야 인터넷에서 본 내용 프린트해서 달달 외우고서는 적당히 소품 갖추고 점을 보겠답시고 나선 사람일 것이다. 나라고 그 정도 내용을 모르는 것도 아니고, 이렇게 타로카드라는 게 흘러넘치기 전, 20세기 말에 이미 충분히 접해봤고, 그래서 이게 사기에 가까운 말장난이고, 중요한 건 말솜씨와 믿으려는 마음 뿐이라는 것도 안다. 그런 사람이 대뜸 소원을 묻다니. 마케팅 컨셉을 잘못 잡았다고 밖에는 할 말이 없다. 이봐, 아줌마. 여기 있는 건 점괘 하나에 어떻게 하나 어떻게 하나를 되뇌는 여학생이나, 위안거리가 없어서 점을 보러 다니는 아줌마가 아니라 곧 서른을 앞둔 남자라고. 그런 얘기를 바로 내뱉지는 못하고, 그냥 소심하게, 하지만 충분히 퉁명스럽게 말했다. “맞춰 보세요.” 그녀는 잠깐 말이 없었다. 나도 더 이상 말이 없었다. 침묵이 부자연스러워지기 직전에, 그녀가 반응했다. 피식. 글자로 옮기자면, 그런 비슷한 소리가 될 것이다. 의성어로 상황을 설명하는 방식에 대해 꽤나 거부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그러고 싶지는 않지만, 내 능력으로는 다른 표현을 찾을 수가 없었다. 타이어가 바람을 토해내고 주저앉는 소리, 빵빵한 풍선이 손을 뿌리치고 날아가는 소리, 막 입을 떼고 뚜껑을 닫은 튜브가 쪼그라드는 소리와는 다른, 명백한 비웃음. 의도를 명백히 전달하지만 의도를 명시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명백히 전달하는 그 행위. 나는 얼굴을 찡그리며 그녀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두건에 손을 대고, 젖혔다. “좋아요.” 그녀가 그렇게 말했는지, 아니면 ‘싫어요.‘라고 말했는지 잘 알 수는 없었다. 그녀가 두건을 젖혀서 드러난 얼굴이 내 눈을 통해 머리통 전체를 끌어들였기 때문이다. 미인이었다. 다른 여러가지 표현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그 모두를 끌어안고서 덩실거리며 춤을 출 수 있는 것은 딱 하나. 그 말 뿐이었다. 그녀가 카드 탁자에 통 하고 쳤다. 그 소리에 나는 정신을 차리고, 간신히 내 감탄에 시선을 뺏기지 않고, 그녀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자, 그럼 시작해 볼까요.” 그녀의 입술이 움직였다. 약간 오물거리는 듯이 말하는 그 입술에는 점이 하나 있었다. 윗 입술 가운데에서 살짝 비켜 찍힌 점이, 부드러운 곡선의 움직임을 도드라지게 했다. 그녀는 카드 한 장을 뒤집은 채로 내려놓았다. “자, 일단 하나.” 그렇게 말하는 입술은 양 끝이 아주 살짝 들려올라가 있었다. 그 모습이 날개짓하며 나에게 날아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 카드를 뒤집으려 했다. “왼손.” 그녀는 그렇게 말하며 나를 제지했다. 그 때 닿은 손 끝이, 차가웠다. 그 온도가 내 가슴을 찔러왔다. 명치 바로 아래, 왼쪽 갈비뼈 사이로 난 상처가 피를 흘리며 내 입을 열게 만들었다. “손이 왜 그렇게 차나요?” “소원이 있을 테지요?” 내 질문에 그녀는 질문으로 답했다. 나는 내 목이 왜 메어오는지는 모르지만, 대답했다. “어째서 손이 그렇게 차나요.” 그녀는 약간 화가 난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눈꼬리가 올라간 얇은 눈이, 달처럼 휘어서 그 끝으로 또 나를 찔렀다. “온기가 필요하지 않나요?” 나는 다시 물었다.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 손은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는 시선을 피하고 말했다. “소원이 있을 테지요?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소원이.” 그렇다. 내가 이룰 수 없으니 그것은 소원이었다. 나는, 왼손을 천천히 뻗어 카드를 잡았다. 카드는 따뜻했다. 그 온기에 눈물이 났다. 거기 존재하는 과거의 편린은 따뜻했다. “네가 보고 싶어.” 나는 카드를 뒤집었다.

토사곽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