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날의 손풀이

2008-07-10

“그러면 협상은 결렬이라는 건가?” 그녀는 커피에 설탕을 넣으며 그렇게 말했다. 여섯 스푼 째였다. “꼭 그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어. 것보다 설탕 너무 많은 거 아냐?” 참지 못하고 그렇게 말했지만, 금방 후회했다. 그녀는 샐쭉해진 얼굴로 되받았다. “당분은 뇌에 꼭 필요하니까. 왜. 불만이야? 살 찐다는 거야? TV에 나오는 계집애들처럼 뼈랑 가죽만 있는 애들이 좋아? 이거 자기가 사 준 다이어트 설탕이잖아. 그런데도 불만이야?” 나는 뭐라 받아치지 못하고 빈 컵만 만지작거렸다. 입 안에 남은 커피가 썼다. 역시 인스턴트 커피는 블랙으로 먹는 게 아닌데. 그녀는 단숨에 커피를 들이켰다. 술처럼. “어쨌든 좋아. 오늘로 끝이니까.” 그녀가 그렇게 말하며 컵을 내려놓았다. 사기 컵이 테이블 위에 놓인 유리와 부딪혀 소리가 났다. 카랑. 분명히 카랑이었다. 푸욱이 아니었다. 푸욱은 내 가슴을 그녀의 촉수가 뚫고 나오면서 내는 소리였다. 촉수는 그녀의 목 뒤에서부터 땅을 뚫고, 내 바로 아래에서 솟아올라 엉덩이부터 심장까지를 꿰뚫고, 가슴으로 튀어나왔다. “항상 그랬지? 넌 너무 대충대충이라니까.” 그녀는 혀를 차더니 촉수를 다시 뽑았다. 촤르륵. 내 몸은 그 소리에 맞추어 바닥에 넘어졌다. 위아래로 난 구멍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미안.” 그녀는 그렇게 말하고는 탁자 위에 올려둔 핸드백에서 물티슈를 꺼냈다. 그녀는 항상 그랬다. 관계가 끝난 다음에도, 그녀의 촉수며, 내 성기며 하는 것들을 꼭 물티슈로 닦았다. 어차피 씻을 텐데 왜 그러냐고 해도 그녀는 항상 그 버릇을 고집했다. 그녀가 꼼꼼히 촉수를 다 닦은 다음에 나는 천정에서 뛰어내렸다. 그녀의 뒤로. 파직. 흔한 효과음이지만, 나는 지금까지 이 소리를 더 이상 잘 표현한 말은 찾지 못했다. 1만3천볼트의 전압, 6암페어의 전류가 0.5초간 내 손끝에 머물다가 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촉감은 더 빨리 사라졌다. 그녀는 바닥에서 몸을 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그녀의 체력은 정말 굉장했다. 정신력은 더욱 더. 나 같으면 온 몸을 전류가 관통한 상황에서, 전신의 근육이 제멋대로 튀고 있다면 고개를 돌려 서 있는 사람을 쳐다볼 생각은 하지 못할 것이다. “새 옷일텐데. 미안해.” 나는 그녀를 내려다보며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세포 조직은 이 정도 전기를 견딜 수 있다. 하지만 강한 전류는 전신의 근육신경에 과도한 신호를 준다. 불수의근이라고 해도 예외는 아니다. 그녀의 다리 사이로 새어나오는 칙칙한 색의 액체와 고약한 냄새. 나는 쑥스럽게 웃으며 품에서 칼을 꺼냈다. 높은 소리로 칼이 울었다. 이거라면 그녀의 심장까지 닿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눈을 보며 힘차게 칼을 내려찍었다. 온 몸의 무게를 실어서. “대충 하지 말랬지. 기껏 가짜몸까지 준비하고, 속아 넘어갔는데도 바로 찌르지도 않고.” 그녀는 아직 몸을 떨고 있었지만, 촉수는 내 몸을 들어 올릴 정도로 회복되었다. 숨이 막혀왔다. 팔이 움직이지 않아서 칼을 사용할 수도 없었다. “하, 하···.” 무언가 말하려고 숨을 뱉은 순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머리가 아득해진다고 생각한 순간, 내 옆에 누운 그녀가 보였다. “정신 차리는···데 오래··· 오래 걸리네.” 그녀는 가쁜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했다. 나는 바닥에 쓰러진 채로 물었다. “얼마나 걸렸어?” “모르겠어. 두, 두시간은 걸린 것 같은데.” 그녀의 얼굴이 새파래져 있었다. 나는 손을 뻗어 내가 좋아했던 그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항상 매끄러웠던 그 검은 머리는 손을 대자마자 부스러졌다. 나는 침을 삼켰다. 목이 메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되기 전에 내 손으로 끝내고 싶었어, 약효가 돌면 시체가 흉해지니까.” “마리,마리아모네 즙인거야?” 그녀의 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산티로사 뿌리도 갈아넣었어. 혹시나 안 달까봐.” “평소보다 달았어. 한 스푼 정도면 견딜 수 있었을텐데.” 그녀는 웃으며 그렇게 말했다. 잇몸이 무너지면서 이빨 몇 개가 빠져버렸다. “눈을 보고 죽이고 싶었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몸을 일으켰다. 더 이상 보고 싶지가 않았다. 일어나자마자 등 뒤에서 그녀가 나를 불렀다. “사랑해.” “사랑해.” 반사적으로 말하며 몸을 돌렸지만, 그녀는 듣지 못했다. 이미 머리가 반쯤 녹아내려 있었다. 들리지는 않겠지만, 나는 참지 못하고 말해버렸다. “것 봐. 설탕 너무 넣었다니까.”

Fedora Core8 설치 완료! 열대야인가